오늘 인디스페이스에서 와니와준하를 봤다. 상영 끝나고 김용균 감독님과 김혜리 기자님의 GV가 있다길래 다녀왔다. 올해는 와니와준하 개봉 20주년, 김혜리 기자의 생일이라고 했다. 또 다음달이면 서울극장이 문을 닫는다. 여러모로 오늘은 극장을 찾기 적절한 날이었다.
와니와 준하를 본 첫소감은 김희선에 대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김희선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구나." 발랄하고 도회적인 이미지 한꺼풀 아래 있던 투명한 유리그릇 같은 말간 얼굴을. 알듯말듯 할 말을 썼다 지운 얼굴을. 예쁘지만 빤히 읽히는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선 덮어진 책처럼 보이지 않고 펼쳐보고 싶은 궁금증이 드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영민, 조승우. 어린 얼굴에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십대 초반의 조승우. 으레 짓는 다정한 미소. 그의 휜 눈꼬리와 입매를 보고 안 떨릴 사람 있을까. 안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문학에 나오는 첫사랑의 얼굴은 죄다 조승우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을 잠깐 했다.
01 영민이 와니의 체취를 맡던 씬. 영민이 2층으로 올라오면서 만들어내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와니의 얼굴에 옅은 기대감이 퍼진다. 문이 열리자 표정을 고쳐잡는 와니. 와니에게 훌쩍 다가와 그녀의 냄새를 가까이 맡는 영민. 와니는 영민이 나가자 자신의 옷을 움켜쥐고 냄새를 맡아보고, 영민이 스치고 간 뒷목을 얼떨떨하게 매만진다. 이 장면 속의 와니의 표정과 행동들이 너무 확실한 사랑의 발현이라 설레고 좋았다.
02 자전거 씬. 학교 앞에서 와니를 기다리는 영민의 얼굴이 어찌나 빛나던지! 자전거를 타고 깜깜한 밤을 가로지르는 둘의 행복한 표정. 집에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 앞에 걸터앉아 둘만의 시간을 가만히 느끼는 와니.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그냥 잠시 시간을 멈춰놓고 싶은 와니의 감정이 느껴져 좋았다.
03. 그리고 영민이 4B연필로 눈썹을 슥슥 그려주다가 와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마는 씬도 빼놓을 수 없다. LP판이 다 돌아가고 토독토독 판이 튀는 소리가 심장박동 소리로 이어지는 게 참 좋았다.
04. 가장 마음이 아렸던 차 안의 고백씬. 아득한 헤어짐을 앞두고 꽁꽁 숨겨놨던 마음을 발설해버리고 마는 와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민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 와니는 그 고백으로 예정 된 이별을 붙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고백은 산산히 부서져 흩어졌다. 영민은 유럽에서 와니의 체취를 오래도록 떠올리고 그리워했겠지. 둘의 진심은 어딘가에 도달하지 못한 채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 채 허공을 떠다니다가 서서히 길을 잃어버렸다. 그 점이 이 영화를 더 아름답게 했다.
그리고 끝내 지금의 영민이 나오지 않은 것이 첫사랑이라는 미완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켰다.
05 현재에서 와니가 엄마와 영민과 통화할 때 그들이 실제로 거실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연출한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와니와 엄마와 영민은 준하가 뒤에 지나가건 말건 TV를 크게 틀던 말던 게의치 않고 말을 한다. 눈길도 안준다. 준하만이 그들을 의식하고 TV볼륨을 줄인다.
와니는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들에게 동거사실은 커녕 준하의 존재조차 밝히지 않은 상태다. 동거를 반대할까봐? 준하가 아직 변변한 수익이 없어서? 와니가 준하를 먹여살리는 처지라서? 뭐 다양한 표면적 이유들이 있겠지만 와니가 그렇게 한 것은, 준하와 자신의 관계를 공표함으로서 영민을 완전히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이었리라. 아무튼 준하는 그녀의 가족 전화를 받게될까봐, 자신을 들키게 될까봐 집에 오는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자동응답기로 넘기기 일수. '와니와 가족의 통화'가 준하를 얼마나 작게 만드는 지. 함부로 받지 못하는 전화는 준하 스스로 둘의 관계에서 자신의 한계와 크기를 가늠하게 한다. 준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보이는 와니의 사적영역, 거기서 그가 느끼는 소외감이 구상화되는 연출이었다.
그리고 물리적인 거리를 허물고 그들을 한 공간에 데려다놓는 전화라는 매체에 대한 경이같은 것도 느껴졌다.
개봉한 지 20년이 된 영화인데 촌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세련되었다. 동거, 이혼가정, 이복형제의 사랑, 동성커플, 장애인... 영화에서 문제거리로 삼을 만한 장치들이 잔뜩인데 어느 것도 과장되게 포커싱 하지 않는다. 민낯에 가까운 수수한 얼굴들과 수더분한 옷차림을 한 인물들이 좋았다. 와니의 직장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다양성이라던가 중요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기보단 에둘러 표현하는 사실성이 좋았다. 내성적이지만 씩씩하고 용감한 면모가 존재하는 와니의 입체적인 성정도 여성 캐릭터를 전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