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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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펫촐드, <피닉스>, 전쟁 생존자의 혼란을 또렷이 조명하고 환부를 나즈막히 쓰다듬는 영화Spoiler Alert 2021. 7. 29. 08:02
적나라한 학대와 폭력을 보여주지 않고도 참상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영화가 있다. 피해자의 무참한 환부를 벌려 렌즈에 들이대지 않고도 아픔이 생생하게. 극 초반, 국경을 넘는 장면에서 펫촐드는 두개골이 파열되고 코뼈와 턱뼈가 깨진 넬리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 대신 넬리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는 군인의 표정을 클로즈업 했다. '이 영화는 피해자의 환부를 벌려 렌즈에 들이대는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니야'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선언은 영화 끝까지 지켜졌다. 단 한 번도 아우슈비츠를 재현하지 않았고, 물리적인 학대나 징그러운 상처를 보여주지도, 수용소 내부의 이야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선연한 고통을 넘겨받았다. 영화는 정체성을 유실한 자의 혼란에 집중한다. 넬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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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욕망으로서의 매저키즘 <피아니스트>에게Spoiler Alert 2021. 7. 17. 05:07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새삼 대한민국에 이런 지면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안도한다. 이 작고 겸손한 매체조차 많은 여자들이 진땀 흘리고 흥분하고 모욕당해가며 얻어낸 것이리라. 이렇게 촌스런 말로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자기 검열로 떨고 있는 소심한 나를 자위(自衛)하기 위함이다. 며칠 전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다.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태어난다면 두 가지 점에서 남자로 살고 싶다"고 했다. 하나는 (아무리 낮은 계급의 남자라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그 많은 자질구레한 진 빼는 노동으로부터 면제된다는 점, 그래서 그들은 '이성'적일 수 있고, 초월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질문 시간에 어느 학생이 다시 물었으나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다. 쥬디스 버틀러는 "페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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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use I wanted you to know”, Call me by your name의 한 조각Spoiler Alert 2021. 7. 12. 01:31
Oliver: Is there anything you don't know? 네가 모르는 게 있기는 해? Elio: I don't know nothing Oliver. 난 아무것도 몰라요, 올리버 Oliver: You seem to know more than anybody else around here 여기 있는누구보다 네가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Elio:Well, if you only knew how little I really know about the things that matter. 정작 중요한 건 거의 모르고 있어요 Oliver: What things that matter 뭐가 중요한데? Elio: You know what things 뭔지 알잖아요. Oliver: Why you 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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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여름,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Spoiler Alert 2021. 7. 12. 01:14
Summer 1983, Somewhere in northern Italy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여름이 깊어지니 생각나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Call me by your name 미적욕구를 증폭시키고 배로 충족시키는 루카 감독의 눈부신 미쟝센, 그리고 사운드트랙. 이 포스팅을 보는 당신이 다음의 음악을 꼭 재생하고 이미지를 감상하면 좋겠다. Call Me By Your Name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Various Artists · Album · 2017 · 17 songs. open.spotify.com 모종의 이유로 다시 보기 힘들어진 이 영화… 거의 확실시 되던 시퀄의 제작도 무산되었다. 루카 감독이 얼른 또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차기작을 가져오길 바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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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니와 준하(2001)Spoiler Alert 2021. 7. 11. 21:56
오늘 인디스페이스에서 와니와준하를 봤다. 상영 끝나고 김용균 감독님과 김혜리 기자님의 GV가 있다길래 다녀왔다. 올해는 와니와준하 개봉 20주년, 김혜리 기자의 생일이라고 했다. 또 다음달이면 서울극장이 문을 닫는다. 여러모로 오늘은 극장을 찾기 적절한 날이었다. 와니와 준하를 본 첫소감은 김희선에 대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김희선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구나." 발랄하고 도회적인 이미지 한꺼풀 아래 있던 투명한 유리그릇 같은 말간 얼굴을. 알듯말듯 할 말을 썼다 지운 얼굴을. 예쁘지만 빤히 읽히는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선 덮어진 책처럼 보이지 않고 펼쳐보고 싶은 궁금증이 드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영민, 조승우. 어린 얼굴에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십대 초반의 조승우. 으레 짓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