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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내 생애 최초의 페미니스트Kitchen Table Novel 2021. 7. 21. 23:35
딸은 엄마가 나를 위해 감내하는 희생에 감동하면서도,엄마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그리고 영향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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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영향 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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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지는 족보를 보물처럼 여기고 제사를 지낼 때면 도포에 유건까지 쓰셨다. 당연히 장남만 자식인 것처럼 구셨고. 집 안의 아들들은 할아버지가 작명집에서 지어온 대단히 거창한 이름을 받았고 나랑 언니는 엄마가 지어준 예쁜 한글 이름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나랑 언니는 매일같이 할아버지 저녁상을 차려드리는 게 무척 불만이었다. 우리 엄마는 일년에 열 한 번 제사상을 차렸다. 그 악명높은 종갓집 며느리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엄만 할아버지의 이야길 누구보다 잘 들어주었고 진심으로 그를 연민하고 사랑했다. 엄마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들… 아내, 엄마, 며느리,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어떤 여성상까지.. 한 사람이 감내하기 벅차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알았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할아버지를, 친척들을 미워했다.
제사 때마다 어르신들은 여자들이 분주한 와중에도 우리 오빠는 옴짝달싹 못하게 쇼파에 잡아두곤 했다. 우릴 둘러싼 전체집합은 가부장의 전형이었지만 적어도 내게 가장 가까운 세계인 엄마는 자식들에게 공평했다. 내가 여자라고 주눅들지 않고 살 수 있음의 큰 기반이 되었다. 우리 형제들이 주제파악하는 염치있는 인간으로 자란 것도.
뭐든 읽고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 엄마는 깡촌에서 명문대에 붙어 상경했다. 과 회장도 하고 형이라 부르는 대학 선배들과 여러번 운동에 나가 구치소에 끌려가기도 했다. 글 쓰는 솜씨를 살려 사회면 기자가 되고 싶어했다. 엄마의 총기 넘치던 학창시절 이야길 들으면 나는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똑똑한 것과 별개로 사람에 대한 정이 많고 믿음을 잘 주는 성정이 엄마의 발목을 잡았다. 석사학위를 딸 때까지 뒷바라지를 다 하겠다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고백을 믿고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거의 동시에 엄마가 그렸던 청사진은 일그러졌다.
결혼한 직후부터 우리 엄마가 아빠로부터 겪은 일들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엄만 너무 스스로를 신뢰한 나머지 아빠의 망나니 작태를 바로 보고도 자신이 그를 갱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처음엔 그래서 아빨 떠나지 않았고 우리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 말 안해도 알겠지. 엄마는 아이들을 혼자 키우다시피 하면서도 틈틈히 통번역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아이가 하나도 둘도 아닌 상황에서 아빠의 재산은 필요불가결이었다. 나는 십대 때 이미 내가 나를 책임질 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결혼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순전히 부모님을 보고 배운 것이다.
전에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나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썼던 일기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 일기를 읽고 나는 이런 사람이랑 어떻게 살았냐고 어떻게 버텼냐고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엄마의 젊음이 아깝고 아까워서. 나는 종종 생각했다. 엄마가 우릴 낳지 않았다면 정말 멋진 삶을 살았을텐데 하고. 내가 세상에 태어나 엄말 만나지 못하고, 이 모든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하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여간 우리엄만 지금도 활자중독인데 고단한 시기를 글을 읽고, 글을 쓰며 버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 짐작한다. 엄마가 시간들을 버티며 쓴 일기가 수십권에 이른다. 어쩌면 백권. 어디에 대고 소릴 지르고 싶을 때 엄만 손가락으로 비명을 지르고 종이에 맘을 게워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엄마도 아내도 아닌 한 사람이 되었다.
내게 아빠와의 추억을 열거하라면 한 손으로도 충분히 꼽는다. 그만큼 우리 인생에 아빠는 없거나 없었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구속하고 혐오하고 질투했다. 그 힘으로 사는 사람처럼 엄마를 괴롭혔고 놔주지 않았다. 엄마는 폭력의 굴레에서도 절대 고개 숙이지 않았다. 엄마가 수백번의 좌절에서도 의연하게 고개를 쳐드는 모습은 아빠의 화를 더 들끓게 했다. 암담한 상황 속에도 꼭 티끌만한 긍정을 찾아 그것만을 취하고 끝없는 인내를 발휘하는 엄마의 태도는 가끔 내게 경이를 느끼게 했다. 아빠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기위해 고군분투한 세월이 스무해가 넘어갔다. 엄마의 사업성과가 나쁘지 않았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쯤엔 부모님의 집이 아니라 엄마집에 살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를 설득하고 아빠에게 빌고 몇 번의 협의이혼을 시도했다. 한 번은 아빠가 모종의 거래를 제안하며 들어주면 이혼해주겠다고 했단다. 엄만 답싹 오케이했고, 이제 비로소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속 된 날, 법원 앞에서 수 시간을 기다려도 아빤 나타나지 않았다. 엄만 그 날 전에 없던 좌절감을 맛 보았고 아주 많이 참담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 일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렇게 또 적절한 시점이 오기까지 몇 해가 지났다. 자식들은 자라 엄마의 이혼을 지지했다. 결국 이혼소송이 되었다. 자식들이 법원에 서서 아빠와 엄마의 관계가 이미 오래전 끝났다는 것을 구구절절 증언하는 것으로 지난한 부부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진술을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보고 겪었던 아빠의 파렴치한을 상기해내야했다. 그 때문에 엄만 우리에게 미안해했다. 이혼 과정에 우리들을 연루시킨 것이 행여 상처가 될까봐. 또 이혼 가정이라는 게 우리에게 손톱만한 흠결이라도 될까봐.
나는 엄마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한 번도 내 삶에 아빠의 부재가 아쉽거나 창피했던 적 없다고. 누구보다 멋진 엄마를 가져서 어떤 가족도 부럽지 않고 엄마가 준 사랑이 충분해서 결핍이 없다고. 그냥 순응하고 평생 참고 살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아줘서, 우리 때문에 참고 살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엄마 인생을 (이미 긴 시간 희생했지만)더 희생시키지 않고 자신을 위해 결단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엄만 말했다. 너희가 엄마 목숨만큼 소중하지만 엄만 엄마 스스로도 너무 사랑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아빠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가 엄마를 위해 한 선택이 곧 우리를 위하는 선택이야.’
엄마가 내게 한 말 중 가슴에 새기는 말이 있다. 몇 대에 걸쳐 내려온 가부장제의 튼튼하고 질긴 뿌리를 엄마 대에서 끊어냈으니 언니랑 나는 더 주체적으로 멋지게 살라고 했다. 어떤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보다 너희가 온전하게 스스로로 존재하고 행복한 것이 중요하다며. 엄만 내 생애 최초의 페미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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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나의 삶이 완전히 분리되고부터 나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지금은 아빠와도 꽤 사이가 좋아졌다. 아빠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미움을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과거 아빠의 행동들을 이해하는 것만은 경계한다. 엄마가 겪은 인고의 시간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Kitchen Table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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