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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 남들이 시를 쓸 때Lunch Poem 2021. 8. 1. 19:37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린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문패도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지친 잠은 내 옆에서 쓰러지자 마자 몸을 웅크리고
가느다랗게 코를 곤다.
나의 잠은 어디로 갔는가.
나의 잠은 방문까지는 왔다가 되돌아 가는지
방 밖에는 가끔
모래알 허물어지는 소리만 보내온다.
남들이 시를 쓸 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남의 잠은 잠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라고
남의 잠은 잠의 꿈이고
나의 잠은 잠의 현실이라고
나의 잠은 나를 위해
꺼이 꺼이 울면서 어디로 갔는가.
/ 오규원,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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