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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 순간을 잡기 위해 쓴다Kitchen Table Novel 2021. 6. 20. 06:37
01
순간을 잡기 위해 쓴다.
글을 적는 일만큼 기억을 선명하게 붙드는 일이 있을까.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맞딱뜨렸을 때 사진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사진 속 장면은 언제고 재구성될 수 있다. 배경은 같은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지만 보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일기는 다르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의 진폭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 때의 나로 잠시 잠깐 회귀하여 내 관점으로 과거의 현상을 감상한다. 그 바람에 당시의 풍경이나 사람들이 입은 옷, 건물들의 모양새 그런 것들은 실제와 전혀 다르게 상상될테지만. 과거의 일기를 읽다보면 지금의 내가 스무살 때보다 조금도 자라지 않은 기분에 소름이 돋을 때도 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02
감정의 정체를 찾으려고(또는 털어내려고) 쓴다.
'좋다, 아주 좋았다'에 그쳤던 감상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장황한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영화가, 음악이, 책이 그냥 '인상'으로만 남지 않게 된다. 어떤 부분이 어떤 기분을 느끼게 했는지 명확히 하는 일은 나의 작고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 된다.
감정의 낙차가 심해서 감당이 안되는 어느 날 혼자있는 방 안에서 책상 조명을 켜고 노트북 앞에 앉아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적어내려간다. 놀랍게도 감정을 들끓게 했던 것들이 다 무용해지면서 마음이 차분해질 때가 있는가하면 벅찬 감흥이 끝나지 않고 글 속에서 더 분명해지며 잠자리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가끔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좋은 기분이었을 뿐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누군가를 보고 느끼는 박탈감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라는 걸 알게되기도 하고.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냈던 수많은 밤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와 화해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악의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것들이 정말 별 게 아니었으며 대부분이 흥분된 상태에서 부풀려진 것들이라는 걸 깨닫는다.
03
일기장이 아닌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곳에 쓰는 이유라면. 누군가 읽어주고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나랑 닮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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